서론: 영화가 묻는 한 문장

 

David Lowery의 《Mother Mary》는 표면적으로 한 팝스타와 그녀의 옛 의상 디자이너의 재회에 관한 챔버 드라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천천히 벗겨보면, 그 안에서 하나의 놀랍도록 정통적인 신학적 질문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왜 인간의 몸이 되어야만 했는가(Cur Deus Homo)? 이 질문은 11세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제기한 성육신 신학의 근본 질문이며, 영화의 의상 디자이너 이름이 Sam Anselm인 것은 이 사실을 숨기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Lowery는 신학과 교수였던 아버지 아래서 "매우 카톨릭적으로" 자랐고, 지금은 공식적으로 신앙을 떠났다고 본인이 밝힌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가 "내가 어릴 때 쓰던 언어로 말하기를 원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언어는 — 보면 볼수록 — 장식이 아니라뼈대다. 이 에세이는 그 뼈대를 따라가며 Lowery가 주장하는 '진리'를 여섯 개의 교의적 명제로 정리해보려 한다.


1. 플롯의 숨은 시계: 수난 주간

Mother Mary가 Sam의 저택에 도착하는 것은 목요일이다. 복귀 공연은 일요일 자정. 이 4일의 배치는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세족목요일 → 성금요일 → 성토요일 → 부활주일의 수난 주간(Passion Week)이다.

목요일은 최후의 만찬의 날이자 성찬(Eucharist)이 제정된 날이다. Sam이 Mary를 측량하고 드레스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 — 그것이 단순한 의상 제작이 아니라 "감정의 화체(transubstantiation of feeling)"라고 선언되는 것 — 은 정확히 사제가 성찬 전례를 준비하는 행위와 구조적으로 포개진다. 금요일은 상호 대면과 폭로. 토요일은 영화가 가장 캄캄해지는 밤, 카톨릭 전례의 성토요일이 '지옥으로의 하강(descensus ad inferos)'의 시간인 것처럼, 영화에서는 두 여성이 자신들의 지옥으로 내려가는 구간이다. 그리고 일요일은 공연 — 부활.

결정적인 부분은 Mary가 마침내 입고 무대에 오르는 옷의 색깔이다. 영화 초반 그녀는 "빨강만 아니면 아무 색이나"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부활주일 아침, 그녀가 입는 것은 Iris van Herpen의 깊은 빨간색 주름 드레스다. 동방 정교 도상학에서 빨강은 인성(人性) — 피, 살, 상처의 색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체(靈體)로의 이탈이 아니라 상처 입은 몸의 부활이다. Mary가 일요일에 빨강을 입는다는 것은, 그녀가 드디어 자기 인간성을, 자기 상처를 감당하기로 결심했음을 의미한다. 아이콘이 다시 몸이 된 순간이다.

2. 이름은 신학이다

Lowery는 캐릭터 이름을 통해 텍스트에 각주를 단다.

Sam Anselm — 안셀무스(1033–1109)는 《Cur Deus Homo》로 서구 성육신 신학의 문법을 정초한 사람이다. 그의 중심 질문은 "왜 신이 인간의 몸을 빌려야만 했는가"였고, 그의 답은 "인간의 죄는 인간의 몸으로만 갚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Sam Anselm의 질문도 동형이다: 왜 Mother Mary는 나의 손을 빌려야만 Mother Mary가 되는가? 성육신은 대리가 아니라 매개가 필요한 사건이다. 그리고 안셀무스의 또 다른 유산인 존재론적 논증 —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id quo nihil maius cogitari possit)" — 도 영화에 숨겨져 있다. Mary가 부르기로 되어 있는 "역사상 최고의 노래" Spooky Action이 영화 내내 관객에게 한 번도 들리지 않는 것. 이것은 들리지 않기에 최고일 수 있는 안셀무스적 개념의 최대값이다. 들려지는 순간, 그것은 더 큰 것이 상상 가능해지므로 최고가 아니게 된다.

Mother Mary — 그녀의 본명은 영화 내내 한 번도 불리지 않는다. "Mother Mary"라는 무대명이 인물의 전부를 대체했다. 아이콘이 인간을 잡아먹은 상태의 정확한 표지다. 그리고 복음서의 성모 마리아 역시 개인사가 거의 지워진 존재라는 것 — 이 침묵은 전통에서 이어진 것이다.

Imogen (FKA Twigs의 영매 역) — 셰익스피어 Cymbeline의 주인공이자 게일어에서 "처녀(maiden)"를 뜻한다. 영화에서 Imogen은 영을 불러들이는 매개자다. 처녀가 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 수태고지의 정확한 구조 변형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천사가 임하여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복음 서사가, 영화에서는 영매가 분필 원 안에서 유령을 불러들이는 세앙스로 거울화된다. 같은 구조, 다른 극성.

3. Spooky Action: 양자 얽힘이라는 현대의 신비체

이제 영화가 숨겨둔 가장 대담한 은유로 간다. Spooky Action이라는 곡 제목은 아인슈타인의 spukhafte Fernwirkung —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을 묘사하는 그의 표현 — 을 직접 인용한 것이다. 한 입자의 상태가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다른 입자의 상태에 즉각적으로 연결된다는 현상. 국소성(locality)의 위반.

Lowery는 인터뷰에서 양자물리학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반짝이는 감독이다(Rolling Stone 프로필이 이를 명시적으로 기록한다). 그는 이 현상을 영화의 중심 은유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양자 얽힘은 신학적으로 정확히 대응물이 있다: 성도의 교통(communion of saints), 혹은 신비체의 교의(Mystical Body of Christ).

카톨릭 교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지체의 고난과 은총은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다른 지체들에게 실재로 전달된다. 이것은 감정적 공감이 아니라 존재론적 연결이다. 한 수도원의 수녀가 드리는 기도가 지구 반대편의 죄인에게 실제로 효력을 미친다는 주장.

영화의 Mary와 Sam은 10년간 서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얽혀 있다. Sam의 오프닝 내레이션 — "나는 그녀가 오는 것을 느꼈다" — 은 감정적 직관이 아니라 양자적/신비적 진술이다. Red Woman은 두 사람 양쪽에 동시에 나타난다. 둘 중 누가 관찰되든, 다른 한 명의 상태가 즉시 결정된다.

이 은유의 귀결은 마지막 곡 제목 Cut Ties에서 완성된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감정적 포기가 아니라 얽힘의 물리적 해체 — 양자 측정이 얽힘을 붕괴시키듯, 창조적/성애적 유대를 공식적으로 종결하는 것은 실재의 구조를 바꾸는 행위다. 영화는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 실제 존재론이라고 주장한다.

4. 몸에 새겨진 수난: 측량 장면의 해부학

Sam이 Mary의 치수를 재며 몸에 숫자를 적는 장면은 영화의 성사적 정점이다. 목에 7, 손에 22, 등에 9. 이 배치는 그리스도 수난의 해부학적 재구성이다.

손의 22는 시편 22편이다. 이 시편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른 수난 시편이며, 16절은 "그들이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Mary는 나중에 세앙스 도중 손에 성흔(stigmata)을 입는다. 손 = 22 = 찔린 손의 시편.

등의 9는 그리스도가 죽은 시각, 제9시(the ninth hour, 마태 27:46)의 숫자다. 동시에 9는 임신 9개월의 숫자이기도 하다. 죽음의 시간과 잉태의 시간이 같은 숫자를 공유한다는 것. 그리고 등은 전통 도상학에서 **채찍질(scourging)**의 자리다. Mary의 등에는 이미 수직의 흉터가 있다. Sam은 그 흉터 위에 9를 덮어 쓴다. 기존 상처를 수난의 시각과 잉태의 시간으로 동시에 기표화하는 것.

목의 7은 완성의 수(7성사, 7은사, 7고통)이자 순교의 자리다. Mary는 과거 공연 중 빨간 의상에 목이 걸려 거의 죽었다. 그리고 Sam은 Mary의 초기 페르소나가 잔다르크 — 순교당한 여성 성인 — 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목 = 7 = 순교를 통한 완성.

이 세 숫자가 함께 말하는 것: Sam은 드레스의 치수를 재는 것이 아니라 성수의(sindon, burial shroud)의 치수를 재고 있다. 그녀가 만드는 것은 무대 의상이 아니라 수의이자 성체다. 영화의 첫 곡 제목이 "Burial"인 것은 이 장면의 반향이다. 의상은 애초부터 매장과 부활의 기표였다.

5. 세앙스: 미사의 역(逆)상

Dublin 호텔의 세앙스 장면은 단지 공포 요소가 아니라 미사의 기하학적 역행이다.

가톨릭 미사에서: 사제가 **제대(altar)**에 서서, **성체(host)**를 들어 올려, 그리스도가 성체에 임하게 하고, 회중이 그것을 입을 통해 몸에 받아들인다.

세앙스에서: 영매(Imogen)가 분필 원 안에서, Mary의 몸을 제대로 삼아, 영이 Mary에게 임하게 하고, Mary는 그것을 손의 상처를 통해 받아들인다.

형식은 완전히 동일하다. 차이는 오직 그 영이 어떤 성질의 존재인가 하나뿐이다. 그리고 Lowery의 가장 위험한 철학적 도박이 여기서 나타난다 — 영화는 그 판단을 거부한다. 영이 선한지 악한지, 수호천사인지 악령인지, 영화는 끝까지 확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영화의 가장 논쟁적인 명제다: 세속화된 세계에서 거룩한 것과 악령적인 것은 구조적으로 구별 불가능하다. 카톨릭 교회에는 교도권(magisterium)과 전례 전통이라는 식별 장치가 있다. 그러나 팝 성사에는 없다. 그래서 관객은 — 그리고 인물들도 — 선과 악의 방향을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

6. Red Woman: 태어나지 않은 아이

Red Woman은 무엇인가? 영화는 여러 후보를 겹쳐 놓는다. Sam의 원한. Mary의 억압된 자아. 두 사람 사이의 끊어진 관계. 그러나 가장 신학적으로 무거운 독해는 이것이다: Red Woman은 Mary가 잉태했어야 했으나 유산시킨 자기 자신이다.

성모 마리아 신학의 핵심은 잉태와 출산이다. Mary는 Word가 육신이 되는 통로였다(John 1:14). 영화의 Mother Mary는 정반대의 임무를 수행한다 — 그녀는 아이콘을 잉태하고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유산시킨다. 그녀가 "Mother"라고 불리는 순간마다, 진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가능성은 한 번씩 죽어간다.

Red Woman이 Sam의 침대 발치의 피 웅덩이에서 솟아오른다는 디테일은 이 독해를 지지한다. 월경혈, 출산혈, 상처의 피 — 영화는 이것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여성의 피가 성화와 순교와 생식의 경계를 가로지른다는 급진적 주장이다. Red Woman은 유산된 자아의 유령이자 태어나지 못한 가능성이다. 그녀가 빨간 천의 형태를 띠는 것은, 아직 재단되지 않은 원단 — 형태를 얻지 못한 가능성 — 의 순수 상태이기 때문이다.

7. 결말: 상호 고해성사

마지막 곡의 제목은 Cut Ties다. 이 제목은 세 층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탯줄을 끊는 것(출산의 완성). 유령과의 끈을 끊는 것(엑소시즘). 관계의 공식적 종결(용서 후의 놓음).

카톨릭 7성사 중 **화해성사(Reconciliation)**의 구조로 읽으면 영화의 결말은 이렇게 배열된다. 첫 30분의 원한과 비난 = 양심 성찰. Mary의 무너짐 = 참회. 두 사람의 상호 폭로 = 고백. Red Woman의 방출 = 사죄. 드레스의 완성과 공연 = 보속.

그러나 여기서 영화의 가장 급진적인 제안이 등장한다: 사제가 여성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사제 역할을 두 여성이 서로에게 교대로 수행한다. 영화에는 대사 있는 남성 인물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페미니즘적 제스처가 아니다. 카톨릭 전통이 남성 사제권에 독점적으로 할당했던 성사 집전의 권능이, 영화 안에서는 두 여성의 친밀한 진실 대면으로 온전히 이전된다. 교회론적으로 이건 폭탄이다.


결론: Lowery의 여섯 명제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영화가 주장하는 '진리'는 다음 여섯 개의 명제로 정리된다.

첫째, 성사적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전되었다. 미사는 콘서트로, 사제는 아티스트로, 성체는 팝스타의 몸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구조 안에서 초월을 경험한다. Lowery는 이것을 풍자가 아니라 진지한 관찰로 제시한다.

둘째, 이전된 성사는 불완전한 성사다. 제도적 교회에는 식별 전통이 있지만 팝 성사에는 없다. 그래서 현대의 아이콘들은 자기 자신의 공허에 잡아먹힐 상시적 위험에 노출된다.

셋째, 몸은 기억한다. Mary의 등의 흉터, 손의 성흔, 목에 남은 매달림의 흔적. 모든 수난은 육체에 실재로 기록된다. 거룩한 상처(sacred wound) 없이는 성화가 없다.

넷째, 창조는 존재론적 행위다. 감정의 화체는 은유가 아니다. 진짜 유령을 만들 수 있고 진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따라서 창작자는 표현의 책임이 아니라 존재의 책임을 진다.

다섯째, 얽힘은 실재한다. 영혼과 영혼은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물리적 은유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Spooky Action은 물리학이자 신학이다. Cut Ties는 감정이 아니라 존재론적 조작이다.

여섯째, 구원은 사적이다. 공연은 해답이 아니라 해답이 드러나는 장소일 뿐이다. 진짜 구원은 무대 뒤, 두 여성의 대면에서 이미 완성된다. 그리고 그 대면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사제가 된다.


사족: 근데 솔직히 영화 자체는 별로였다.

Lowery는 이 영화가 The Green Knight와 Peter Pan & Wendy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이 찢겼던 시기의 산물이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상업영화를 만드는 자기와 예술영화를 만드는 자기 — 그 둘을 Mary와 Sam이라는 두 인물로 나눈 것. 그런데 이 구조 자체가 신학적이다. 하나의 인격, 두 본성(one person, two natures) — 이것은 칼케돈 공의회(451)의 그리스도론이다. 완전한 인간이면서 완전한 신인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의 긴장을, Lowery는 자기 자신의 창작적 분열로 사적으로 재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최종 진리는 아마 이것이 아닐까. 우리가 교회를 떠났다고 믿을 때, 교회는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측량하고, 재단하고, 때로는 심판한다. Sam이 Mary의 몸에 7과 22와 9를 적는 것처럼. 성수의는 항상 한 치수 먼저 재단된다.

 

무슨 의미를 담았던지, 보는 내내 스트레스였다.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고, 그 모르겠음이 두 시간 누적되니까 결국 짜증이 났다.

 

클로드랑 대화 안 했으면 이런 신학적 구조 같은 건 절대 못 봤을 거다. 그리고 그게 문제다. 이 깊이는 영화가 보여주는 게 아니라, 관객이 끌어와서 맞춰줘야 보이는 거다. 카톨릭 도상학, 안셀무스, 양자역학까지 동원해서 관객이 능동적으로 짜맞춰야 그림이 떠오른다. 이건 영화의 미덕이 아니다. 작가가 자기 머릿속 정리를 관객에게 떠넘긴 거고, 두 시간 동안 그 미정리의 비용을 내가 낸 거다.

 

Mary가 중간에 "These metaphors are exhausting"이라고 말하는 장면. 이게 모든 약점의 압축이다. Boston Globe 평론가가 "Amen to that, sister"라고 받아친 건 농담이 아니라 항복의 메아리다. 작가가 자기 과부하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 정리하는 대신 캐릭터 입에 그 말을 넣어서 농담으로 처리한 거다. 자조가 아니라 항복 선언이다. "나도 너무 많은 줄 알아, 근데 어떡할 거야." 좋은 작가는 이 대사가 나오기 전에 가위를 들었어야 한다. Sam이 한 시간 지나도 가위를 안 드는 것처럼, Lowery도 자기 스크립트에 가위를 안 댔다.

 

이 영화는 에반게리온의 같았다. 카발라, 종교 도상학 잔뜩 뿌려놓고 "이게 다 의미 있어 보이지?" 하는 그 제스처. 적어도 에반게리온은 그냥 볼내용이라도 있었지. Mother Mary는 그 닻이 없다. Mary가 무너져도 안 울린다. Sam이 분노해도 그 분노가 안 만져진다. 표면의 기호만 떠다니고, 그걸 묶어줄 정서적 중력이 없다.

 

Black Swan은 정서로 끌고 간다. 의미 다 못 풀어도 끝나면 뭔가를 느꼈다는 건 안다. Mother Mary는 둘 다 못한다. 정서로 끌지도, 질문을 또렷이 던지지도 않으면서 "내가 얼마나 깊은지 봐봐"를 자기 자신한테만 말하고 있다. 자기 철학을 아무렇게나 흩뿌려놓고 작품이 됐다고 생각하는 그 태도. 그게 제일 피곤했다.

 

결국 이 영화의 깊이는 영화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영화 밖에 있다. 관객이 만들어줘야 생긴다. 누구한테는 매력일 수 있다. 근데 그건 영화의 미덕이 아니라 관객의 너그러움이다. 두 시간 쓰면서 거기에 너그러움까지 얹어야 한다면, 그건 그냥 좋은 영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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