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서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할 때 자주 듣는 결론이 있다.
"그 사람들은 결국 빵을 보고 따라왔다."
오천 명을 먹이신 그 기적 다음 날, 군중이 호수를 건너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리고 예수님이 한마디 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설교자들이 이 본문에서 자주 이렇게 매듭을 짓는다.
"보세요, 군중은 결국 빵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맙시다."
그런데 나는 이 결론이 너무 쉽다고 느낀다. 무언가 빠져 있다.
군중을 정죄하기 전에, 잠시 그 자리에 우리도 함께 서 보자.
먼저 빌립을 보자.
오천 명을 먹이신 그 유명한 기적이 일어나기 전, 예수님은 일부러 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빌립아,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리고 본문은 곧 친절하게 덧붙인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답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일부러 물어보신다. 그리고 일부러 빌립에게.
왜 하필 빌립이었을까.
빌립은 벳새다 출신이었다. 그 지역의 시장 사정과 빵값을 가장 잘 아는 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제자에게 물었으면 "글쎄요…" 했을 질문이, 빌립에게는 즉각 계산기가 돌아갈 만한 질문이었다.
빌립의 답은 그래서 빠르고 정확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을지라도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부족하리이다."
200일치 일당이 있어도 한 명당 한 입씩도 안 된다. 숫자가 정확하다. 시장 사정도 정확하다. 결론도 정확하다.
문제는 정확함이 아니었다.
빌립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었다. 공급원, 비용, 분배. 이 프레임 안에서 빌립은 천재였다. 그런데 그 프레임 안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바로 자기 옆에 서 계신 분.
빌립은 그분을 못 본 게 아니다. 자기가 잘 아는 프레임 위에 그분을 올려놓을 자리가 없었다. 빌립의 계산 프레임에서 예수님은 변수에 들어갈 수 없는 분이었다.
이게 그날 시험의 정체였다.
지식이 부족했던 게 아니다. 지식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
빌립은 계산의 언어로 생각했고, 예수님은 그 계산판을 통째로 뒤집을 분으로 거기 서 계셨다. 빌립의 머릿속에서 그 두 세계가 만나지 못했다.
빌립의 마음속은 아마 이런 상태였을 것이다.
"음… 200데나리온… 5000명… 어림없다… 사장님 죄송한데 이건 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조용히 받아드신다.
그날 저녁, 기적이 일어났다.
보리떡 다섯, 물고기 두 마리. 그것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
이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즉각 한 단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모세.
광야. 굶주린 백성.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정확히 같은 장면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1세기 유대인에게 메시아 기대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매우 구체적인 프레임이 있었다.
신명기 18장에서 모세가 한 약속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모세 같은 선지자. 이게 그들의 메시아 프레임이었다.
그 프레임 안에서 메시아는 이런 분이어야 했다.
압제에서 백성을 해방하시는 분.
광야에서 떡을 공급하시는 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
새로운 출애굽의 지도자.
오천 명이 광야에서 떡을 받아먹은 그 순간, 이 프레임에 너무도 완벽하게 맞는 장면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외친 말은 거의 자동이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분을 왕으로 모시자."
예수님은 그 순간 — 사람들이 가장 환호하던 그 순간 — 조용히 산으로 떠나신다.
이 장면이 흥미롭다.
빌립의 프레임에는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빌립은 못 보았다.
군중의 프레임에는 예수님이 정확히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모세 자리. 그래서 그들은 너무 잘 보았다. 너무 잘 본 나머지, 자기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오해했다.
빌립의 프레임에는 그분이 없었고, 군중의 프레임에는 그분이 잘못된 자리에 놓였다.
둘 다 같은 문제다.
프레임이 있다는 것.
그리고 6장 전체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 프레임을 다루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날 밤 예수님을 놓쳤다. 그러나 다음 날, 그들은 호수를 건너 예수님을 찾아간다. 가버나움까지.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 답은 분명했다.
더 많은 떡.
더 많은 기적.
이번에는 정말로 왕으로 모실 것.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자마자 첫마디로 진단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따끔하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요.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호수까지 건너온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명분이 아니라 그들의 동기를 보신다. 그들의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한 가지를 원하고 있었다.
모세와 같은 떡의 지속적 공급.
그리고 노예에서 대탈출을 시켜 줄 메시아.
메시아 인정도, 왕 추대도, 결국 그 프레임 안의 기능이었다. 그 프레임 안의 메시아는 결국 떡을 끊임없이 주는 사람이었다.
이게 그들의 프레임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이다.
본인들은 자기 동기를 못 본다는 것.
본인들 머릿속에서 자기들은 진심으로 메시아를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더 깊은 곳을 본다. 그리고 사실 — 우리도 자기 동기를 그렇게 자주 못 본다.
여기서 자주 놓치는 점이 있다.
그들의 모세 프레임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성경이 준 것이다.
신명기가 그 프레임의 첫 번째 붓질을 했다. 출애굽기가 만나로 색을 칠했다. 시편이 그것을 노래로 정리했다. 이사야가 새 출애굽의 비전을 더했다. 수백 년의 박해와 해방 이야기들이 그 프레임에 정치적 윤곽을 입혔다.
이건 단순한 오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실하게 성경을 읽은 사람의 프레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잘못된 책을 읽지 않았다. 같은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 책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못 보았다.
이게 6장의 정말 거친 진실이다.
올바른 성경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설교자가 "그 사람들 빵만 봤네,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라고 매듭지을 때, 나는 잠시 멈춘다.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광야에 있었다. 5천 명이 먹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모세의 약속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울렸다. 눈앞의 분이 정확히 그 약속에 맞아 보였다. 자연스러운 반응이 무엇이었겠는가.
"이분이다."
이건 얕은 사람의 반응이 아니다. 이건 자기 전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의 반응이다.
다음 단계는? "이분을 왕으로 모시자." 이것도 자연스럽다. 그들의 프레임 안에서 메시아는 왕이어야 했다. 정치적 해방자여야 했다. 그 프레임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다음 날 호수를 건너 따라간 것도 자연스럽다. 약속의 분을 만났는데 어떻게 안 따라가겠는가.
이 모든 행동이 프레임 안에서는 완벽히 합리적이고, 심지어 경건하다.
그런데 — 여기가 핵심이다 — 프레임 안에서는 프레임이 문제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프레임을 깨러 들어가신다.
먼저 모세를 비키신다.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에서 내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너희가 기억하는 그 만나, 그건 사실 모세가 준 게 아니다. 모세는 통로였지 출처가 아니다. 떡의 출처는 늘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결정타가 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아.
여기서 프레임이 깨진다.
모세 프레임 안에서 예수님은 떡을 주시는 분이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떡 자체라고 말씀하신다.
이 둘은 단순한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카테고리 자체가 다른 것이다.
빵집 주인과 빵의 차이.
선생과 교과서의 차이.
다리와 강 건너편의 차이.
군중의 프레임은 첫 번째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곧 나온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수군거림.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 벌어졌는가.
가버나움이었다.
요한복음 6장 59절이 명시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가버나움이 어떤 동네인가. 예수님의 갈릴리 본거지였다. 나사렛을 떠나신 후 머무신 곳. 마가복음이 "그 동네"라고 부르는 곳. 베드로의 집이 있던 곳. 그분이 매주 회당에 가시던 곳.
다시 말해, 그 회당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분을 일상적으로 봐 온 사람들이었다.
장터에서 마주쳤던 사람. 회당에서 매주 같이 예배드렸던 사람. 그분의 어머니가 어디 사는지 아는 사람. 그분의 형제들과 이름이 익숙한 사람.
그런 그들 앞에서 그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수군거림이 안 나올 수 있을까?
"아니, 저 사람 우리가 매일 보는 사람이잖아. 어머니도 알고 형제들도 아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이 반응은 영적 무지가 아니다.
자기 눈으로 본 일상의 증거다.
그리고 일상의 증거만큼 강력한 인식의 기반은 없다.
가버나움이라는 장소가 사실 이 진리 충돌의 핵심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만약 예수님이 낯선 동네에서 그 말씀을 하셨다면 — 처음 본 신비로운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 차라리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을지 모른다. "아, 하늘에서 오신 분이구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들의 동네 사람이었다.
이게 가버나움에서의 강화가 갖는 무게다.
그분은 익숙한 사람으로서 익숙하지 않은 주장을 하셨다.
그리고 익숙함은 종종 신앙의 친구가 아니라, 신앙의 가장 큰 장벽이 된다.
저 사람의 부모를 우리가 안다. 저 사람이 자라는 걸 우리가 봤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들 입장에서는 그분을 모세라고 믿어 주는 것 자체가 이미 큰 믿음이었다. 평생 회당에서 듣던 그 약속의 분이 눈앞의 이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 — 그 단계까지 오는 데도 마음의 다리를 한참 건너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다리를 건넌 자리에서 다시 한 걸음 더 가자고 하셨다.
이게 6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무서운 진실이다.
프레임은 안에서 깨지지 않는다.
빌립은 자기 계산 프레임 안에서 그것을 못 벗었다. 그래서 빌립에게는 "어디서 떡을 살까"가 가장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군중은 자기들의 모세 프레임 안에서 그것을 못 벗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왕으로 모시고 떡을 항상 주시게 하자"가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두 경우 모두, 프레임 자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프레임 안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건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같은 장 안에 한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 말이 처음에는 가혹하게 들린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잘못이에요?"
그런데 곰곰이 보면, 이 말은 정죄가 아니라 인정이다.
당신의 안경은 당신이 안에서 벗을 수 없다. 안경을 보려면 안경 밖의 시점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그 시점이 없다. 그래서 외부의 손이 와서 안경을 벗겨주어야 한다.
"나는 너희 프레임 안에서 너희가 도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너희 힘으로는 못 온다. 알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끌어오신다."
이 말 안에는 군중을 향한 묘한 자비가 있다. 너희가 가진 프레임으로 너희가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을 안다. 다만 그 프레임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래서 다른 손이 필요하다.
이게 본문이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 거친 진리다.
6장 후반은 그래서 슬프다.
많은 제자들이 떠난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그들에게도 프레임이 있었다. 그 프레임이 깨지자, 떠난다. 프레임이 깨질 때 프레임 너머로 함께 가지 못한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의 답이 결정적이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우리가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흥미로운 점은 — 새로운 프레임의 등장이다.
"영생의 말씀이 있으신 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이것도 베드로의 프레임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프레임은 다른 종류였다.
모세 자리에 예수님을 끼워 넣은 프레임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새로 빚어진 프레임.
프레임이 없어진 게 아니다. 프레임이 다시 빚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은 베드로가 자기 손으로 빚은 게 아니었다.
여기서 우리도 잠시 멈추게 된다.
빌립은 계산기를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군중은 모세 안경을 쓰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떠난 제자들은 이해 가능성이라는 프레임을 들고 서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다시 빚어 주신 프레임을 들고 서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자리에 우리가 서 있다면, 우리는 어떤 프레임을 들고 있는가?
성공의 프레임? 안정의 프레임? 평안의 프레임? 정의의 프레임? 인정의 프레임? 똑똑함의 프레임? 도덕적 우월감의 프레임?
누구도 프레임 없이 예수님 앞에 서지 않는다. 빌립도, 군중도, 떠난 제자들도, 베드로도, 그리고 우리도.
아니면 아직 나도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에이 있는 프레임이 있을까? 너무나도 당연해서 아무도 꺠지 못하는 프레임
그리고 어쩌면 이게 가장 거룩한 가능성일지 모른다.
우리가 지금 들고 있는 프레임 — 너무 자연스러워서 프레임으로 안 느껴지는 그것 — 도 사실 깨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빌립의 계산이 그날 깨졌듯이. 군중의 모세가 그날 깨졌듯이. 우리의 무엇이 다음 차례인지 우리는 모른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우리의 편, 하나님의 축복, 내편을 들어주는 분 등등
그리고 어쩌면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은 — 우리가 지금 상상조차 못 하는, 그 프레임 너머의 프레임을 깨러 오시는 날일지 모른다.
1세기 군중이 "메시아는 모세 같은 분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이런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무언가를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 확신은 우리에게 안 보인다.
그리고 그 확신이 깨지는 자리에서, 그분이 오신다.
차이는 하나다.
프레임이 깨질 때 떠나느냐, 남느냐.
그리고 본문은 솔직하게 말한다. 깨진 프레임 너머로 가는 것은 우리 손으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 우리 손을 잡고 데려가 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6장의 가장 조용한 메시지는 이것일지 모른다.
당신의 프레임이 깨지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거룩한 순간일 수 있다는 것.
그 순간 비로소 그분이 우리의 프레임 안에 들어오시는 게 아니라,
프레임 자체가 그분에 의해 다시 빚어지기 시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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